많이 걷고 있다 by James




삶이나 사람에게 있어서도 톤이란 게 있다면 나는 분명 톤이 다운되어 있음을 이젠 인정한다. 지금은 이렇게 '인정한다'라는 표현을 쓰지만 이미 내가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 왔는지도 모른다. 최근에 다시 관계라는 걸 만들어 가려고 이런 저런 만남을 하면서, 한 번은 그런 톤이 다운된(우울함이라 정확히 얘기했다) 느낌이 내가 연애를 못하게 하는 몇 가지 중 하나라고 했다. 그 사람은 그러면서 평범하지 않은 생각, 독특한 성격 등이 그런 몇 가지 중 하나라고 말했다. 나는 웃었지만 그건 쓴웃음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건 내가 살아오면서 스스로 만들어 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서른이 되어서야 소개팅이란 걸 해봤다. 이런 저런 연애를 꾸준히 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통은 평소에 알던 사람과 서서히 연인으로 발전해왔던 내 경험 상 미팅이든 소개팅이든 그런 걸 할 여유도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긴 연애가 끝나고 이젠 자유라며 내 시간을 갖겠다고 다짐했지만(그게 오래 가지 않을 줄 알았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다시 연애 생각이 났고 나는 처음 보는 사람과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가끔 긴 시간 동안 술을 마시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씁쓸함이 뒤따랐다. 그 이유는 내가 평생 몰랐던 소개팅에 담겨 있던 '시스템'때문이다. 누가 이런 걸 만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왜 남녀가 1:1로 동등한 입장에서 만나지 못하는 자리가 되어 버렸는지 내 머리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위에 수없이 얘기했다, 이제 이런 거 안 하겠다고.

잠시나마 나를 바꾸려 한 적도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내 주위에서 알던 사람과 연인의 관계로 발전할 만한 상황은 오지 않을 것 같았고, 그렇다면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내가 그 시스템에 적응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잠깐이나마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나는 하려면 할 수 있었으니까. 그 누구보다 잘 할 자신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접었다. 소위 나는 내 잘난 맛에 살아 왔는데 그냥 있는 그대로 살자라는 위로 아닌 위로를 본인에게 했기 때문이다. 뭐 언젠가는 이런 나라도 괜찮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 라며 그냥 그렇게 살기로 한 것이다. 여전히 주말을 소중히 생각하고 나 자신을 키우는 것들을 찾아다니는 그런 삶 말이다. 일은 밥벌이일 뿐이고 내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한 삶. 일요일 아침엔 혼자서 봐도 무방한 영화들을 조조로 보고 이곳 저곳 걸어다니기 좋아하는 삶. 한 달에 두 세번은 좋아하는 레코드 가게에 가서 CD나 LP를 여러 장 사고 서점에서 꾸준히 책이나 잡지나 사보는 그런 생활. 시도 때도 없이 커피를 마시고 술은 자주 마시진 않지만 마시게 되면 취할 때 까지 마시는 그런 삶을 그냥 나는 이끌어 가기로 했다.


요즘은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을 꽤 음미하면서 읽고 있다. 단편 하나하나가 지금 내 삶의 분위기와 맞아서 그런지 몰라도 다 마음에 들면서 만족해하는 중이다. 보통 단편은 바람이 쉭 하고 빠지면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잘 안좋아하는데 이번엔 다르다. 그런데 매번 하는 얘기지만 이제 나는 '하루키 좋아해요' 라고 남들한테 말하지 않는다. 그냥 혼자 좋아하고 말지,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 말이 가져올 영향력을 이제는 배제하고 싶기 때문이다. 아, 최근에 이것과 연관된 일이 하나 있었다. 내가 제일 난감해 하는 질문 중 하나가 "무슨 음악 좋아하세요?"나 "어느 작가 좋아하세요?" 등인데, 할 말이 없기 보다는 했을 때 상대방이 느끼는 당황스러움때문에 이런 질문을 받으면 뭐라 답해야 할지 머리가 멍해진다. 내 경험 상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본인만의 취향이 잘 없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 만약 그런 취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화 하는 중간중간에 이미 눈치를 채기 마련이다. 혹은 자신의 취향을 먼저 얘기하는 경우가 더 많다. 어쨌든 최근에 한 소개팅에서도 어떤 작가 좋아하냐고 물어서 "김연수 좋아해요. 혹시 아시나요?" 답했더니 그 사람은 모른다고 하면서 대표 작품이 뭐냐고 묻길래 나는 우물쭈물했다. 그러고보니 김연수 대표작은 뭐라고 얘기 해야 하지?(나는 끝내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이라고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말했다)


최근에 내 삶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아마 달리기를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숨이 턱에 차오를 만큼 뛰는 건 아니지만 꾸준히 운동을 한다는 건 2년간 내 직장 생활을 돌아볼 때 고무적인 일이다. 큰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직장 생활하면서 내 몸은 부풀 때로 부풀었고 이런 내 몸이 연애FA 시장에서 안 먹힌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주위에 농담처럼 얘기 하곤 한다. 처음엔 그냥 몸무게도 줄이고 건강도 생각하려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중엔 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달리는 이유가 더 컸다. 직접 선곡한 재생목록을 켜놓고 중랑천 근처를 꾸준히 뛰다 보면 어느 순간엔 날 괴롭히던 생각들이 많이 사라졌다. 실은 그동안 나는 수많은 가정법과 싸워왔다. '만약 XX가 OO했다면'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나를 너무나 괴롭혔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채웠고 나는 계속 답을 하거나 그런 가정법을 버리려 애썼다. 그 생각이 꽤 고통스러워서 괴로울 정도였다. 하지만 달리기를 할수록 그런 가정법을 많이 지울 수 있었고 지워진 질문 속에서 내 자신을 조금은 더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 틈이 날 때마다 퇴근 후에 달렸고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다. 몸무게를 줄인 것보다 좋았던 게 바로 잡생각을 지우는 것이었다.

직장인 2년차에 나는 일에 꽤 많이 적응했다. 주위에 묻지 않아도 대부분의 일을 혼자 처리할 수 있게 되었고 나름대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위 사람들이 좋아하는게 뭔지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었고 그 분위기에 맞는 건배사 몇 가지도 언제나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일에서 벗어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욕망하는 삶은 이어지고 그 욕망은 불완전하게 채워진 채 살고 있지만 그리 나쁘지 않다. 인스타도 꾸준히 하고 있고, 실제로 이어진 몇 번의 만남에선 나는 웃음과 위로를 받고 있기도 하다. 먹는 것에 대한 욕망은 확연히 줄어 들었고 마시는 것에 대한 욕구는 여전하다. 별 기대않던 음악과 영화에 여전히 감동받고 좋아하며 이런 순간을 위해서 돈벌이 작업을 이어간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기록은 줄었지만 삶에서 느끼는 황홀한 순간들은 여전하다. 그걸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게 조금 아쉽지만. 어쩌랴, 지금 내 상황이 그런 걸.

10월도 이런 저런 일로 보내다보니 또 끝이 다가온다. 걷기에 너무 좋은 날들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 나는 많이 걷는데, 조금 더 걸었으면 좋겠다. 추워진다고 못 걷는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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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