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왔고 바람이 불었고 당신이 좋았다 by James



  어제는 비가 많이 왔다. 내가 가는 카페라 해봤자 매번 스타벅스인데, 여러 스타벅스 중에서도 요즘은 창이 크고 조용한 특정한 곳을 자주간다. 어제는 그 비를 뚫고 오후에 나갔다. 다행히 내가 좋아하는 자리가 있어서 그곳에 앉았다. 언제나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샷을 추가했다. 가방안에는 토익 RC 문제집과 <다정한 호칭>이 들어 있었다. 비는 하염없이 내렸고 나는 당연히 시집을 먼저 들었다.

  노트북을 들고 나와야 할 일이 있었기에 많은 짐을 챙길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다이어리는 집에 두고 나왔다. 시집을 읽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아이폰 메모장에 급하게 남겼다.

  어느 순간부터, 말끔하게 씻겨 물기 자국조차 남지 않은 컵보다는 커피자국이 은근히 붙어서 사라질 생각을 않는 게 더 좋아졌다. 누군가는 이걸 흔적이라고 할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시간이라고 부를테다. 젖은 수세미에 퐁퐁을 뿌려 컵을 빙글빙글 이리저리 돌리며 빡빡 닦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이건 여행일까 떠남일까.

  이렇게 글을 쓴 순간에야 내가 그동안 글과 너무 멀리 떨어져 지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전의 나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이게 비 때문인지 진한 커피 때문인지 둘 모두 때문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수 년 전의 내가 떠올랐다. 그러다가 그녀에게 이 말을 해야 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 선물받고 싶은 책이 있어, 라고.

  여러 루트를 통해 이병률의 새 여행산문집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가 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너무나 많이 팔렸고 여러 버전이 반복재생산된 <끌림>을 나는 좋아한다. 보통 같았으면 이렇게 인기 많은 책은 우선 거부감이 드는게 나 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대에 있을 때 그녀가 보내준 이 책을 나는 너무도 열심히 그리고 꼼꼼히 읽었다. 그의 책을 읽을 때면, 어서 나가서 내 필름카메라로 여러 모습을 찍고 싶어졌다. 그처럼 여행을 갈 수는 없었지만 순간을 담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그의 여행산문집이 또 나왔다. 나는 그 때의 내 기분을 다시 느껴보고 싶어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흔쾌히 알겠다고 했고 바로 내 손에 들렸다. 나는 비가 오는 어제 그 카페에서 이 책을 조심스럽게 넘기기 시작했다.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또 다시 나는 손쉽게 예전으로 돌아갔다.


  빨리 읽히는게 싫었다. 이 한 권의 책을 빨리 읽는 것 자체도 싫었는데, 이상하게 문장이 쉬워졌단 느낌도 없지 않았다. 예전에 <끌림>을 읽었을 때는 명징한 의미로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 글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번 책은 정말 말 그대로 수필같았다. 그러다가 중간에 이런 구절이 나왔다. 자신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던 한 소중한 분을 해외에서 만난다는 일화였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어느 사진가의 작업실에서였다. 그녀와 같이 두어 달 가량 암실 수업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내가 필름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늘 만날 때마다 슬쩍 필름 몇 통을 건네주곤 했었다.
  "나보단 병률 씨가 더 필요할 것 같으니 이 필름 가져다 찍어요."

  단지 옛 얘기일 뿐이지만 나는 눈이 아파옴을 느꼈다. 뭣때문일까. 예전에 내가 생각났기 때문일까, 이 소중한 분의 따뜻한 마음 때문일까. 나는 사람이 없는 넓은 카페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눈을 천장으로 들었다. 눈알이 뻐근해 옴을 느꼈다. 나는 이럴 때 매번 책을 덮는다. 그리고 가만히 있는다. 뭔가를 써야겠단 생각도, 생각해야 겠단 의지도 없다. 그냥 그대로 있는다.

  이 순간에 또 나는 예전의 나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이런 글들, 감정의 움직임이 불균등하게 나를 지배하던 시절의 내가 다시 들어온 것이다. 아, 나는 그랬었지 라며. 그녀에게 이 책을 사달라고 말하길 잘했다, 라고 느끼며. 그리고 군대 시절과 똑같이 나는 내 필름카메라가 생각났다. 과거에 시도때도 없이 찍으면서도 동시에 사라지는 필름이 아까웠고, 돈이 생길때까지 현상을 맡기지 못하던 그때의 나. 그리고 현재 아이폰이 생기면서 더 이상 필름으로 찍는 건 의미가 없는 것 같다고, 아니, 이제 그럴 돈도 여유도 없다며 카메라를 팽개쳐놓은 내가 동시에 떠올랐다.

  하지만 과거는 흘러갔고 현재는 남아 있지만 내 과거가 진짜의 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런 느낌을 잘 받지 않는다. 언제나 과거보다는 현재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내 과거가 나에게 들어오고 나를 지탱하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나는 그게 나쁘지 않다. 내가 속한 적이 현재로서는 없기때문만은 아니다. 그냥 내가 원했고 바라던 삶이 이게 아니라는 건 명확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지금은 아무것도 확정하고 싶지는 않다. 이 기회에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가야겠단 확신도 없고, 지금의 이 순간적인 감정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할 뿐이다.


  나는 다시 덮었던 책을 펼쳐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나갈테다. 그치만 이제 집 밖에서 이 책을 읽진 않을거다. 내 공간에서, 이 공간을 많은 상상과 감정으로 채울것이다. 그러면 또 다른 답 혹은 길이 나오지 않을까. 이젠 눈이 아파오도록 견디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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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