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간의 이야기들 by James


  잡지사에서 일을 한 지 4주가 지났다. 잡지 이름도 정해졌다. <GEEK>이다. 긱 매거진으로 불릴지는 확실치 않지만, 긱이다. 회사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하나하나 칠판에 적어두고 지워가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나는 조금 진중한 분위기를 원해서였을까, raison d'être, NAVY, BLANK, ANCHOR 등을 적었다. STOP도 냈었다. 각 스펠링에 의미를 부여했었고, 여기서 밝히긴 좀 민망하다. 내가 가장 끌렸던 것은 네이비와 앵커였는데, 바로 탈락되었다. 20대 남성 전반을 다루는 터라, 무거울 수 없었다. 편집장님은 인디잡지들의 우울함은 최대한 배제하고 싶어했다.

  같이 일하던, 아르바이트로 회사 자체에서 뽑힌 두 명 중 한 명은 2주 만에 나가고, 한 명은 어제로 그만뒀다. 원래 한 달만 하기로 했었다고 했다. 나에겐 4월에도 할 수 있냐고 제의하셨다. 나는 우선 알겠다고 했는데, 사실 몇 개 안되는 짐을 다 싸서 나왔다. 이제 기자들도 대충 정리된 듯 하고, 포토그래퍼들과 얘기도 다 된 듯하다. 이제 정말 기사 쓰는 일만 남았다. 나는 기사는 쓰지 않고, 최근에는 필요한 아이템들을 조사하고 그것을 픽업하는 작업을 한다.

  현재 느낌으론 이 잡지는 차분하진 않고 약간 튈 것 같다. 하지만 기존 잡지인 크래커나 블링과는 다르다. 첫 호이기에 긱에 어울릴만한 이미지나 아이템들을 많이 가져오려고 한다. 사실 긱을 정하기 전에 많은 얘기가 있었다. '찐따'라는 원래 의미를 아예 벗을 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엔 그 부정적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냥 하기로 했다. 이 잡지가 말하는 긱은, 하나에 몰두한 사람이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에 빠져서 남의 시선은 그리 게의치 않는 사람들을 다루고 싶었다. 일종의 덕후를 말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 잡지는 그들을 이 세상에서 루저가 아니라, 인정하고 싶어한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그게 바로 그 사람이라고 인정해주고 싶어한다. 나는 그 마음만은 충분히 공감한다.

  누군가가 스니커즈를 모은다고 치자. 자신이 지네가 아닌 이상 하루에 그 많은 신발들을 다 신을 수 없다. 가끔 하루에 한 켤레씩 바꿔가며 신어도 한 달 내에 전 신발을 못 신는 사람도 있을테다. 하지만 그들을 주위에서 뭐라고 할 수 있나. 아무도 그럴 권리가 없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행위에 남들이 왈가왈부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나는, 그리고 이 잡지는 그들이 가진 전문성을 보려고 한다. 하나에 빠져 있다는 것은 그 분야의 전문성을 갖췄다는 뜻이기에. 이 잡지는 매달 주제가 있다. 그 주제에 관해서 좀 더 깊이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그로 인해서 잡지 자체를 콜렉하도록 만들고 싶어한다. 일본 잡지들처럼 과월호 판매도 물론 한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재미없는 시간도 분명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즐거웠다. 우선 마음놓고 패션 관련 블로그나 카페, 편집샵 등을 들락거릴 수 있어 좋았다. 물론 기업에 원서도 넣었다. 많이 넣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넣었다. 광탈을 했다는 사실도 존재했다. 하루에 세 군데에서 탈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 불확실한 미래를 보면, 아르바이트 삼아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겠지만 이게 과연 제대로 내 삶을 꾸려가고 있는건가 싶을 때가 많았다.

  같이 일하던 한 사람과 금요일에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 날 사실 많이 아팠다. 그 전날 운동을 열심히 하고 오랜만에 치맥을 먹었다. 그게 탈이 났는지 출근한 이후에 몸이 좋지 않았다. 픽업할 물건들을 가져온 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잠을 잤다. 그 같이 일하던 사람도 나보고 한숨 자라고 했다. 잠을 잠시 잤더니 좀 낫긴 했지만, 그래도 퇴근시간까지 고통스러웠다. 까스활명수를 두 병이나 마셨다. 페리에가 있어 두 병이나 마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왠지 서글퍼서 눈물이 났다. 퇴근하는 사람들 속에서 민망해 금방 그쳤지만, 좀 슬프더라. 오랜만에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났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라고 묻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체한 게 사라지니 장염이 왔다. 화장실을 자주 갔다. 어제는 거의 하루종일 잤다. 그런데 이상하게 푹 잤다. 일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어서 그런지, 정말 푹 잤다. 어제 밤엔 잠이 안와 새벽 3시 까지 책을 봤다. 그래도 아침 7시 반에 눈을 떴다. 잠을 잘 땐 편안했지만, 일어나니 배가 여전히 아팠다. 그래도 할 일은 하자는 생각에 빨래를 하고 집안 정리를 했다. 뭔가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없는데, 커피는 굉장히 마시고 싶다. 하지만 지금 이 속에 커피를 넣으면 분명히 탈이 날 것 같다.

  지난 번에 사온 김현식 전집을 다 리핑하지 않았다. 이런 박스셋을 한 번에 리핑하면 분명 제대로 듣지 않기 때문이다. 3집까지만 변환을 해놨는데, 지금 나머지를 리핑하는 중이다. 너무 미뤄뒀던 것 같아 리핑을 하고 음악을 듣고 있다. 어제는 미뤄뒀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봤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영화 같지만 들여다보면 성기지 않은 스토리가 참 좋다. 그리고 그 수많은 수다들도 좋다. 레이첼 맥아담스는 볼 때마다 매력적이다. 백치미를 가진 캐릭터라도 좋다. 이 영화를 다 보니, 옛날 노래들이 듣고 싶었고 원서가 읽고 싶었다. 가장 좋은 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읽는 것이지만, 그 원서는 부산집에 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게 <The Lovely Bones>다. 예전에 읽다 말았는데, 잊고 있었다. 색이 굉장히 바랬지만, 그래도 침대에 누워 그냥 읽고 있다. 하루는 또 반이 지나갔다. 내일 나는 출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덧글

  • 요비 2012/07/06 22:32 # 삭제 답글

    오 정말 신기해요 ! 저 긱 사볼까 하고 지금 블로그 검색해본건데 처음 뜬 블로그가 이거라니 ! ! ! 우왕
  • James 2012/07/07 08:11 #

    아, 그런가요? 몰랐네요;;
    저는 이제 일을 하진 않습니다만 구하시면 아무쪼록 즐겁게 읽어 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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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