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복된 새해 by James


  김연수의 동명 단편을 읽은 이후에 나는 언제나 새해가 되면 이 문구를 이용한다. 모두에게 복된 새해. 마지막에 '를'을 붙일까 말까 고민하지만 김연수가 오마주 형식을 취해 노골적으로 레이먼드 카버에게 마음을 보냈다면, 나도 그런 김연수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하고 싶다랄까. 어제와 오늘을 가르는 몇 초가 지나고, 나는 트위터에 저 문구를 썼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짹짹이는지 계속 오류가 났다. 그리고 오늘은 페이스북에도 이 문구를 남겼다. 그리고 이 글을 관심있게 읽든 지나치며 우연히 읽든, 읽는 모두에게 복된 새해.

  내가 내 다이어리를 못 산 것은 처음이다. 다이어리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매년 12월 중순 즈음에 마음에 드는 다이어리를 직접 골랐다. 다이어리와 펜 같은 것들은 인터넷 쇼핑과 비슷한데, 실측만 나와 있는 옷이나 신발을 주문해서 직접 입어보고 실패해봐야 대충 감을 잡듯이 다이어리와 펜도 직접 써봐야 자신에게 맞는 게 무언지 알 수 있다. 나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다가 최근 몇 년 간 미도리 제품을 썼다. 큰 사이즈는 나에게 번거롭다는 걸 깨닫고 작은 사이즈를 매번 이용했다. 얇은 줄이 그어져 있는 다이어리를 쓰는 것은, 손바느질을 하고 마지막에 실을 묶어야 할 때 큰 손을 가진 내가 느끼는 어려움 및 고통과 비슷하다. 그래서 아예 아무것도 없는 다이어리(사실 이건 그냥 굵은 무지 노트다)를 사서 내 손으로 달력과 위클리를 그린다. 그 텅 빈 느낌은 무언가를 채워야 하는 욕구를 더 자극한다.

  그런 작은 미도리 제품을 올해는 구입하지 않았다. 아직 취직도 하지 않았으면서 직장인이 되면 뭔가 많은 내용을 쓸 것만 같아 큰 걸 원했다. 거기다가 그동안 한 번도 써보지 못한 몰스킨을 써보고 싶었다. 몰스킨 제품은 작은 수첩용 제품은 계속 써왔는데(세 개 묶음으로 판매 하는 제품), 다이어리류는 써보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몰스킨이 더 상업화되어서 가격도 오르고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는데, 언젠가 써보고 싶었다. 그러다 최근 서점에 간 김에 둘러 보았는데, 우선 내 마음에 드는 건 여전히 플레인 라지 노트다. 다이어리류들은 모두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줄이 그어져 있었다. 위클리 버전이 그래도 가장 마음에 들었다. 왼쪽엔 한 주가 일별로 나누어져 있었고 오른쪽 페이지는 노트용이었다. 하지만 노트에 줄이 그어져 있어서 패스(사실 이 제품은 이미 대부분 품절이었다).

  플레인 라지 하드커버 노트와 미도리 미디움 사이즈 무지 노트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 온 것이 스타워즈 에디션이었다. 스타워즈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만 왠지 끌리는 그 무언가(이게 포스일까). 검색해보니 팩맨 에디션(플레인 제품을 여전히 구한다)이 나에게 더 잘 어울렸겠지만 이젠 구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플레인 라지는 2만원대 후반이었고, 스타워즈 에디션 플레인 라지는 3만 3천원이었다. 반면 미도리 제품은 미디움 사이즈를 사고 겉에 비닐 커버까지 구입해도 만 칠 천원대였던 것 같다. 가격면에선 단연 미도리 제품일텐데(사실 쓰면서 크게 불편한 점도 없었다), 이번엔 몰스킨이 끌렸다. 하지만 아직 살 여유가 없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다이어리를 새로 살 때의 그 기분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동시에 새 해를 기대하는 마음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내가 좋아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올 해는 그러지 못했다.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아서 바깥 외출도 쉽지 않을 정도였다. 크리스마스도 집에서 조용히 지나갔고, 31일이 다가올 즈음에도 역시 약속이 없었다. 혼자 집에서 계속 있었다. 집에 TV가 없어서 연말 시상식도 못 봤고 종치는 순간도 접하지 못했다. 하지만 올해는 이례적으로 복 많이 받으라는 연락을 많이 받았다. 이게 스마트폰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오늘 몰스킨 스타워즈 에디션 플레인 라지를 선물로 받았다.


  지난 해 다이어리를 펼쳐보니 공백이 많다. 원래 미리 해야 할 일은 다른 색상으로 적어두고 해결했을 경우 줄을 긋는데, 다른 색상으로 적은 내용이 거의 없다. 거의 다 검은색으로 이미 지나간 일들을 기록하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 또한 이번엔 '올해의 문화생활'을 정리할 수가 없다. 특히 음반과 책이 그러한데, 내 기억이 맞다면 구입하고 기록하지 않은 것들도 분명 있다. 근데 그게 무엇인지 이제 감이 잡히질 않는다. 지금까지의 내 삶에선 도저히 볼 수 없었던 부분이다. 내 삶의 대부분으로 채워져 있던 CD와 책에 관한 기록이 불완전하다니(영화는 그래도 꼬박꼬박 기록해 둔 듯하다). 더 놀라운 것은 작년에 내가 구입한(선물 아닌 선물도 많이 받지만) 책과 CD의 양이 대학 들어온 이후로 가장 적었다는 것이다. 사회와 단절되어 있었던 군대에 있을 때 보다도 훨씬 적은 양이다. 학기 초에 교생도 나가고 이후에 과외도 거의 없이 살아서 재정적으로 힘든 것도 있었지만, 좀 심할 정도로 적게 구입한 것은 사실이다.

  이게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닌게, 작년에 내가 읽은 책의 양이 지극히 적다. 읽은 책의 제목은 매번 다이어리에 순서대로 기록해 뒀는데, 총 19권이다. 게다가 인문사회 서적은 단 두 권 뿐이고 전부 소설과 에세이, 시집 등의 문학 서적이다. 특이할 만한 점은 작년 시작을 <1Q84> 1권으로 했고 마지막에 읽은 책은 <1Q84> 2권이라는 점이다. 만화책과 잡지 등을 구입하긴 했지만, 이건 읽었다고 기록하지 않았다. 그리고 느낌 상으로도 잡지를 굉장히 사지 않았다. 이전엔 거의 매주 씨네와 한겨레21 등을 구입했지만 작년에는 이상하게 관심이 없었다. 언론을 같이 전공하면서 신문도 잘 보지 않았다.

  이미 지나간 해는 어쩔 수 없다. 시간이 흘러 2011년을 되돌릴 때 내 기억엔 교생실습 외에는 크게 없을 듯하다. 조용했고 재미가 없었던 한 해였다. 유쾌하고 즐거우며 나 자신이 발전하는 느낌은 거의 갖질 못했다. 그래서 올해 다이어리를 쓰기 위해 준비하면서 생각했다. 올해는 책과 CD를 많이 사고 영화도 많이 보리라 다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들 외에 나 자신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쉽게 찾을 수 없다. 내가 지금 삶이란 것을 살아가고 있다고 지각하는 순간은 바로 이러한 것들을 즐길 때다. 전후관계 파악은 명확하지 않겠지만, 이 존재들이 부재했던 작년이 그래서 재미없었는지도 모른다. 올해는 다시 도약(어쨌든 이게 소비와 관련이 되어 있는데 돈 쓰는 게 도약이라 할 수 있다면) 해야겠다.

  좀 다른 얘기지만 김근태 전 상임고문이 별세했다. 너무 급하게 갔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내가 그동안 그에게 관심을 잘 가져오지 않았다는 증거일테다. 그런데 그가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남긴 마지막 글의 제목이 날 강하게 자극했다. '2012년을 점령하라'. 이 말은 정치적 의미를 많이 내포하겠지만 그 의미까지 받아들여 올해의 내 목표로 정했다. 원래 강하고 거친 표현들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뭔가 '파이팅'하는 자세를 삶 자체에선 잘 안가지려 한다. 가령 새해 초에 많은 목표를 세우고, 올해는 꼭 이것들을 이루어야지 라는 생각들은 날 지배하지 못했다(과연 그 목표가 연말에 기억나는지도 난 의문이었다). 작년과 올해는 해가 지고 뜨는 차이지 삶의 연속성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는 그런 걸 좀 가져보려고 한다. 목표까진 아니더라도,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려 한다. 지난 12월이 유쾌하지 않아서 더 그럴수도 있지만 되돌아보니 2011년 자체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이 상태로 나를 이끌어나가면 분명 발전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지금까지 나와는 좀 다른 태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점령하라는 표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올해는 대학생의 신분을, 아니 학생이란 신분을 벗어나는 해다. 가능하다면 직장인의 탈을 쓰게 될 해다. 이제 다시 새로울 미래를 설계할 순간들이 다가온 것이다. 그 밑그림을 이제부터 그려보려 한다. 새로운 다이어리에 또 줄을 그으며 달력을 만들고 숫자와 요일을 적어 나갈 것이다. 줄이 만든 칸 속에 어떤 이야기들이 담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올해는 많은 것들이 담기길, 그리고 좋은 것들이 담기길 기대해본다. 내년 이 시간에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있을까. 즐거웠고 점령했다는 내용은 꼭 들어가 있기를. "In a galaxy far, far away.."



덧글

  • optimismm 2012/01/02 09:48 # 삭제 답글

    내년에 맞을 이 시간즈음, 다이어리를 보면서 과거로의 회귀에 빠져들 시간이 더 길어지길 바라요. 제임스님 복된 새해 되시길
  • James 2012/01/02 10:41 #

    오우. 블로그에서 뵙다니 새롭네요. 다이어리 읽는 재미가 느껴지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optimismm님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길.
  • Run192Km 2012/01/02 10:39 # 답글

    다이어리.. 전 사봐야 안 쓰는 이쁜 무언가가 늘어나는 것 뿐인지라..ㅎㅎ
    메모는 에버노트로! @ㅅ@)/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
  • James 2012/01/02 10:45 #

    개인적으로 메모를 많이 하는 삶을 이루고 싶네요. 요즘 기억력도 떨어져서 해야하지만요;

    그러고보니 런 일구이님께 새해 인사도 못했네요 ㅡㅜ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길!!
    조만간 런 일구이님께서 구워 주시는 고기를 먹도록 해요!
  • 夢鏡 2012/01/03 11:09 # 답글

    눈팅만 하다 댓글쓰네요.
    저도 깔끔한 게 좋아서 이것저것 찾다가 결국 만년다이어리에 정착했어요.
    가죽커버에 속지는 리필되는 걸로요. 쓰다보니 편하고 막 쓰기도 좋고 그러더라구요.
    속이 헤지거나 터지면 [워낙 넣는 게 많아서..] 다른 리필지로 교체하면 되니 좋더라구요.
    그래서 삼년째 쭈욱- 쓰고 있습니다 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James 2012/01/03 12:32 #

    반갑습니다. 이글루스로 이사 오신 것 같은데 환영합니다 ^^;

    일전엔 저도 속지만 갈아 끼워넣는 다이어리를 써본 적이 있지만, 다이어리는 아무래도 뭔가 새로 사서 갖고 싶더라구요;; 어렸을 땐 사진도 펀칭해서 끼워넣고 자료들도 많이 넣고 그랬는데 요즘은 다이어리에 따로 넣는 건 쿠폰이나 스티커 정도네요.

    복 많이 받으시고 한 해 건강하시길!
댓글 입력 영역


메모장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